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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2021.06.09

회귀자 사용설명서 4주년 & 이기영 기일 합작

일러스트: 구 (@g_goisso)

글: 김멍게 (@kim_unida)

 오늘 따라 유독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린델에 내리던 길고 긴 비가 드디어 그치고, 장대비에 며칠을 젖어있던 돌바닥은 고작 몇 시간 쬔 볕에 허망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그간 내리던 비에 식은 시원한 바람, 아직 조금 눅눅한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물기 머금은 잎사귀들이 모여 그려내는 푸른 녹음은 싱그럽기 짝이 없는 생명을 노래한다. 모든 것이 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풍경은 후련하고 상쾌했다.

 뚝. 뚝.

 바닥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김현성은 멈춘 걸음을 깨달았다. 멍하니 풍경을 담아내기 바쁘던 눈을 돌려, 맺힌 물방울에 햇빛이 가늘게 부서지는 것을 보고나서야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입가에 걸린 만족스러운 미소는 드디어 맑게 갠 날씨도, 이 아름다운 광경도, 예정된 일정도 모두 마음에 든다는 뜻이리라. 좋은 날이다. 정말로 좋은 날이었다. 어쩐지 들뜬 그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눈에 익숙한 방문이 들어찼다. 그 앞에 가만 선 김현성은 왠지 거울을 한 번 살피고 싶어졌다. 그러나 주위에 마땅한 장소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머리를 한두 번 매만지고 자세를 바로 하는 정도로 만족한 그는 주먹 쥔 손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재질 좋은 나무문과 손이 부딪히며 나는 청량한 소리가 복도를 채운다. 안에 있을 그는 늘 노크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안에서 대답해왔으므로, 이번에도 응당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안에서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의아했지만 아마 바쁜 그가 업무에 집중하느라 이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리라 짐작한 김현성은 그는 손을 움직여 문을 한 번 더 두드려 보았다.

 똑. 똑똑.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청량하다 생각한 소리였건만, 이번엔 그것이 공허하게 들렸다. 김현성의 기대를 배신하고,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왠지 속이 빈 상자를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 복도를 가득 채운 적막이 주는 위화감. 이 공간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숨소리와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뿐이었다. 김현성은 발끝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에 일순 몸을 떨었다.

 시간을 잘못 알았던 것일까? 아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건가? 아니, 그는 약속된 시간에 그런 사소한 우를 범할 성격이 아니다. 그럼 설마….

 김현성은 노크하려 들었던 손을 내려, 문고리를 잡았다. 만일 이것이 결례라면 사과하면 될 일이다.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지금 당장 그의 안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손에 힘을 주고 문고리를 돌리자 열린 문 사이로 새어 들어간 빛이 어두운 방을 밝혔다.

 잠깐, 어두운 방?

 그는 평소와 다른 풍경에 당황했다. 그 방 안에는 여전히 창이 없었기에, 이 방의 주인은 늘 깨어나면 불을 밝히는 것을 가장 우선했다. 그러니 지금 또한 방 안의 불이란 불은 모두 켜져 환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 들어차는 것은 방 안에 켜켜이 쌓인 어둠뿐이었다.

김현성은 걸음을 안으로 옮기고, 방에 배치된 마법등을 밝혔다. 그 모든 행동에 들리는 소음이란 오직 그의 발걸음 소리와 그 옷이 서로 마찰하는 소리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오후의 태양이 뜨듯 밝아진 방 안을 살폈다.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보고, 비어 있는 의자가 앉은 이 없이 차갑게 식어있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불안감에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침대를 보았다. 이기영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는 고급품이었다. 그게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그의 몸은 가지런하게도 그곳에 놓여있었다.

 그래. 놓여있다. 그의 몸이.

 김현성은 급히 몸을 틀어 침대로 향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이에게서는 조금의 움직임도 읽을 수 없다. 다섯 걸음 만에 그는 이기영의 침대 앞에 도착했다.

 눈에 들어찬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핏기 없이 희고 푸르다. 그 코와 입을 통해 들어가고 나와야할 공기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자, 상하운동을 멈춘 그의 흉부가 보인다. 심지어 움직이지 않은지 꽤 시간이 흐른 것 마냥 그 위로 앉은 먼지는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눈을 간지럽힌다. 김현성, 충격적이겠지만 인정해야한다.

 그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완벽하게 호흡이 멎은, 흡사 아이템에 가까운 이기영의 시신이다.

 이기영이, 죽었다.

 죽어? 기영 씨가? 그는 현실감 없는 눈으로 다시 한 번 그 몸을 살폈다. 고요하게 감은 눈 아래 목까지 단정하게 채워진 셔츠 단추와 붉은 넥타이,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한 견장과 망토. 지극히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기영의 죽음을 완전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성과 본능이 모두 저것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왔음에도 말이다.

 그는 가만히 허리를 숙여 귀를 이기영의 가슴팍에 대어보았다. 걸친 옷의 천이 서로 마찰되어 들려오는 소음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이내 찾아온 적막 속에서 그의 귀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어야할 것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김현성은 혹여 그것이 제 숨소리 때문일까 싶어 들이쉬는 숨마저 참아보았으나, 들리는 것은 외로이 박동하는 그의 것 하나 뿐, 이기영의 고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기영의 붉은 넥타이가 그의 턱을 간질였다. 눈에 들어차는 붉은 천은 마치 그의 목을 졸라 교살한 살해도구처럼 느껴졌다.

 확인사살이었다. 김현성은 다시 한 번 이기영의 죽음을 인식했다.

 김현성은 온통 어지럽고 혼몽한 정신을 붙잡고 고장 난 것 같은 몸을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고작 이런 움직임으로 느껴질 리 없는 어지러움에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차라리 이것이 회귀하기 전에도, 회귀한 후로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 온 악몽이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는 현실이었고, 그를 비롯한 모두에게 지독하게 의아하고 비참한 결말이었다. 김현성의 손이 떨려왔다. 핏줄을 타고 그의 속에 묻어둔 죄악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결말은 안 된다. 이런 결말일 수는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가 죽어야할 이유가 무어 있단 말인가. 혹시 저 때문이었을까? 그때 저가 그 몸에 찔러 넣은 검에 의해 다시금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김현성은 저를 좀먹는 묵고 묵은 괴로운 감정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가 죽으면 회귀할 수 있을까? 베니고어, 베니고어. 나를 회귀시켜. 그를, 그를 살려줘.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설명이라도, 그가 죽은 원인이라도 알아야 했다. 예전처럼, 예전처럼 그를 되살릴 수는… 아!

 그렇다, 예전에도 그를 되살릴 수 있었다. 비록 알타누스의 유산을 사용했던 것이지만, 그것을 사용했던 자신 또한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의 죽음을 돌이킬 방법이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김현성은 고개를 들어 빠르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원인을 파악하고 부활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이곳을 탐색할 필요가 있으리라.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머리와 가쁘게 뛰는 심장이 그의 절망 때문인지, 떠올린 희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선 김현성은 아직까지도 열린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름칠이 잘 된 문은 그의 손에 의해 부드럽고 조용히 닫혔다. 그는 걸쇠로 문을 잠그고 나서야 다시금 몸을 돌려 이기영에게로 향했다. 다른 길드원들에게 그를 애도할 시간을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자신이 어떠한 실마리를 얻기 전에는 그의 죽음을 아직 알리고 싶지 않았다. 길드 내에서 김현성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이기영의 죽음. 그것이 내부자의 소행이 아닐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금 침대 맡으로 돌아와 눈을 감고 한숨 쉬듯 심호흡하기를 여러 번. 뜨인 눈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담했다.

 자, 지금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름 아닌 이기영에 대해서.

 이기영은 매일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이였다. 단순히 그에게 업무량이 많아서? 아니, 그는 일하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것에 가까웠다. 몸을 아까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의 한계치는 넘지 않는 워커홀릭. 그것은 이기영을 표현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하나이리라. 그는 그를 대신할 충분한 인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제 손을 거쳐 처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요컨대 그는 그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하며, 제법 계획적인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떤 언질 없이, 예고도 없이 시신만을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다는 건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치밀한 사람이다. 이런 상황이면 반드시 어떤 안배를 남겨둘 정도로.

​

 김현성은 다시금 이기영의 시신을 관찰했다. 몸싸움의 흔적도, 독을 사용하면 보이는 반응도 없다. 그의 주변에 마력반응이 강하게 탐지되지도 않는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이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온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 자고 있다 착각할 정도였다. 김현성은 손에 착용한 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그 뺨을 만져 보았다. 닿는 피부는 역시나 차갑다. 무수한 감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그는 그 중에서 가장 건조한 감상을 꺼내어 들었다. 사망한지 제법 시간이 흘렀구나. 그러나 그 손은 가늘게 전율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 그는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단정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찬다. 김현성이 잠깐 눈을 감고 듣는 이 없는 사과를 읊조리고는, 아직도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착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재킷 주머니를 살피자 움직임 없는 시신에 그새 내려앉아 있던 먼지가 요동쳤다. 어쩐지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며 안을 더듬는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며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눈에 닿은 것은 그 몸 아래 깔린 침구였다. 손에 잡히는 부드럽고 매끈한 촉감을 가진 천은 아마 까다로운 이기영의 취향마저 충족시킬 정도의 고급품이리라. 그는 차분하게 이불을 걷어내어 만져보며, 혹 그 안에 솜 대신 다른 것이 차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그 확인 절차를 거친 것은 베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옅게 밴 이기영의 체향과 이 여름날에도 서늘한 감촉만이 손끝을 맴돌 뿐. 속을 채워오는 거북함에 그 천을 찢어발기고 마는 것은 그저 그의 화풀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문득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툭.

 김현성은 눈을 돌려 소음의 발원지를 확인했다. 그 작은 소리를 낸 것은 나무토막 마냥 딱딱하게 굳은 이기영의 손이었다. 배 위로 얌전히 겹쳐져있던 양손이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그의 몸 옆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김현성은 이를 악물었다. 지르지 못한 악은 눈으로 들어찼다. 어느덧 그의 눈가를 메워온 물기의 무게에 시야는 흐려진 지 오래였다.

 아까 난 소리는 그가 애써 부여잡았던 희망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던 것은 아닐까. 지금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김현성은 아직까지도 떨리는 손으로 이기영의 손을 잡아 원래 그랬던 대로 가지런히 놓았다. 힘이 빠져 두어 번 정도 놓칠 뻔 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명 없는 손은 인형의 것과도 같아 그의 의지대로 자리했다.

 몇 초간 그 모습을 지켜만 보던 김현성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고뇌하는 그의 팔꿈치가 움찔거리고, 박자에 맞추어 박동하던 심장 소리는 흡사 발작에 가깝게 뒤틀렸다. 병증에 가까울 정도로 떨리는 손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그 손과 같이 그의 어깨 또한 가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동요하지 마. 부활. 그래, 그는 부활할 것이다. 분명 그는 살아날 것이고, 그의 안배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아직 전부 살피지 않았을 뿐인 거야.

김현성은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같은 생각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럼에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후로 수십 번의 심호흡이 이어지고 나서야, 떨리던 호흡이 안정되고 부정하게 뛰던 심장 또한 제 박자를 되찾았다. 그는 잘게 떨리는 손을 얼굴에서 떼어낸 후 묻어난 물기를 가볍게 털어내고는 흐릿한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두어 번 정도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의 눈에 문득,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침대 옆에 자리한 작은 나이트 테이블.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가방에 달린 금장식이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이토록 찬란한 것을 지금껏 인식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이기영의 죽음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이리라. 김현성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 가방을 집어 들었다.

 깔끔한 성격인 이기영은 본디 가방을 쓰고 나면 진열장에 넣어두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평소와 달리 나이트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가방. 그의 시신을 본 사람이라면 자연히 시선이 닿을 위치였다. 이 작위적인 배치를 인지한 김현성에게 기묘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열린 가방의 내부를 들여다보려 했지만 아공간과 연결된 탓일까, 육안으로는 그 안에 든 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김현성은 그 안에 손을 밀어 넣고는 찾고자 하는 그의 안배를 떠올렸다. 몇 초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막막함이 어쩐지 낚시를 하는 기분이라, 그것에 만큼은 영 재능이 없던 김현성은 왠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의 눈썹이 아래로 쳐지던 순간, 얇은 종이가 손끝을 스쳤다. 그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 그것을 밖으로 꺼내 들었다. 가방 밖으로 빠져나온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공책 한 권 남짓한 제법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첫 장에 적힌 제목이 김현성의 눈을 파고든다.

[파란 매뉴얼]

 참, 안배의 이름마저 썩 그를 닮지 않았나. 그는 잠깐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기영이 예비한 안배가 있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 그의 죽음에 남은 이들이 어떤 기분을 느낄 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그를 야속하다 탓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것이 그의 유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현성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가장 위에 놓인 종이가 그의 손가락에 감겨들어 뒤로 넘겨진다. 적힌 글자를 읽으려 좌우로 움직이는 안구의 소리, 긴장을 목으로 삼키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첫 문장을 읽은 김현성의 눈이 질끈 감겼다.

 항상 그랬다. 항상 이기영은 이토록 평이하게 굴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토록 평온한 어조로 타인을 걱정할 이가 달리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을 외면한 채 눈을 들어 다시금 매뉴얼을 마주했다.

[이걸 발견하셔서 다행입니다. 쉽게 눈에 띄는 곳에 두긴 하겠습니다만, 혹시나 애꿎은 곳을 뒤지며 엉망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으실지 조금 걱정이 됩니다. 괜한 우려겠지요?]

 그 뒤에 이어진, 마치 상황을 죄 지켜보기라도 한 것 같은 문구에는 어깨가 흠칫 떨렸다. 김현성은 슬쩍 눈을 돌려 뜯겨나간 이불과 그 틈으로 비죽 튀어나온 솜뭉치들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슬그머니 이기영의 시신에 닿았다. 혹여 눈을 떠 자신을 책망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때 지난 만우절 장난 따위가 아니다. 김현성은 텁텁한 것이 제 입안인지 제 마음인지 모를 기분이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일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알리긴 힘듭니다만, 시스템이 저를 바이러스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저를 삭제하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황을 파악한 것은 2달 전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괜히 여러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희생 같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변수를 줄이고 싶었다고 해두겠습니다.

 미리 예비해 둔 보험이 있습니다. 현성 씨 때와 같은 방법입니다. 저에게 퀘스트를 걸어두었으니, 틈을 파고들 신성만 있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모아둔 것이 있으니 보름에서 한 달 정도로 예상합니다.]

 글을 읽던 김현성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황을 미리 말해주었다면 어떻게든 피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원망, 그럼에도 미리 예비해둔 방책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 힘들었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모든 번뇌를 떠넘겼다는 죄책감, 누군가의 암살시도나 배신 같은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속에서 뒤섞였다.

[제가 부재중일 때 길드 운영은 하기 매뉴얼에 따라주시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1) 포션 공정은 계속해서 운영하고, 생산량을 10% 증가시킬 것.

  1.1) 전체 공정 생산량 증가가 어려울 경우, 하기 품목을 집중적으로 생산할 것.

    1.1.1) 체력 증가 포션

    1.1.2) 피로 회복 포션

    1.1.3) 와인 (환상품)

2) 재무 관련은 김미영 팀장에게 일임, 길드 외부 정치 관련은 이지혜에게 조언을 구할 것.

3) 소벨리아의 울음 던전 공략조에는 김현성, 박덕구, 정하얀, 선희영 반드시 포함.

  3.1) 만일 해당 던전에서 언데드 몬스터가 나올 경우…

  3.2) 정신 공격 가능성 있음.

……

4) 스트리비아의 로맨스 던전 공략은 박덕구와 황정연, 안기모, 김예리 반드시 포함. 이후 16명을 추가로 선별하되, 성비 맞출 것. (정하얀 제외)

  4.1)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던 스트리비아에 대한 던전일 가능성 높음

  4.2) 상황 별 대응책은 하단 참고

    4.2.1) 정석적인 연애 재현을 요구할 경우: 박덕구와 황정연이 주역

    4.2.2) 특정 상황의 연출을 요구할 경우: 안기모가 디렉팅할 것

  4.3) 김예리는 안기모가 케어할 것

……]

 이후로 한참동안 파란 길드의 운영 방침이나 던전 공략에 관한 내용이 이어졌다. 이기영다운, 세심하게 모든 가능성을 상정해 철저하기까지 한 내용들에 김현성은 그가 품은 애정을 엿본 느낌이 들었다. 눈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선연한 걱정과 길드에 대한 책임감. 고작 매뉴얼에 불과한 글을 읽는 와중에도 한 없이 그를 연상시키게 된다.

 그가 그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혼란하던 김현성의 마음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히 제 할 일을 해놓은 이기영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으로 차올랐다. 시스템은 어떻게 이런 사람을 바이러스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인가.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잔뜩 고였던 눈물이 방울져 흘러 내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액체를 슬쩍 훔쳐낸 김현성은 이윽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제 죽음을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마세요. 혼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하얀이나 이지혜는 이상을 느끼겠지만, 중요한 연금술 연구에 들어갔다고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베니고어님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다는 말이 이렇게 아픈 인사였던가.

 이기영의 마지막 말을 읽은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떨어진 종이뭉치가 바닥을 어지럽혔다. 아니, 아니었다. 어지러워진 것은 그의 마음이다. 허무감도, 안도도, 감사도, 원망도, 희망도. 그 모든 것이 넘실거리다 이내 그의 눈을 통해 넘쳐 올랐다.

 어떻게, 당신은, 항상.

 온점을 찍지 못할 단어들만이 머릿속에 열거된다. 김현성은 제 표정을 알 수 없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졌다. 올라간 입매를 더듬는 손이 눈물로 젖어 들어간다. 그는 여전히 이것이 어떤 표정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꼬인 생각들에 고개를 떨어뜨리자, 바닥에 수놓인 매뉴얼의 한 부분이 문득 눈을 파고들었다.

[시스템이 저를 바이러스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저를 삭제하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퀘스트를 걸어두었으니, 틈을 파고들 신성만 있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왜 하필 그 부분이 눈에 걸렸을까. 멍청한 기계처럼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읽어낸 김현성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주어졌던 퀘스트 목록을 훑은 것은 그의 타고난 본능에 가까웠다.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니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가 네게 미■를 선물할 것이다.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0/5,132)]

​ 퀘스트가, 고장 났다.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가 ■의 죄를 사하노니 일어나라 ■타누스의 회■자여. 그리하면 ■가 ■■ 미■를 선물할 것이다.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0/4,397)]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가 ■의 ■를 사■■니 일어나라 ■타■스의 ■■자여. ■리■면 ■가 ■■ 미■를 선물할 ■이다.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0/2,124)]

 아니, 정정하겠다. 그것은 사라지고 있었다.

 김현성은 눈으로 보고도 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눈으로 온통 깨져가는 텍스트들만을 읽던 그에게 불현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삭제.

 이기영이 삭제된다면 응당 이기영이 내린 퀘스트 또한 삭제된다는 것일까? 김현성은 떨리는 눈으로 계속해서 줄어드는 숫자를 보았다.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다. 저 광오한 시스템의 횡포를 막을 수가 없다.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 ■■ ■를 ■■■니 일■■라 ■타■■의 ■■■■. ■리■면 ■■ ■■ ■■를 ■■할 ■이■.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0/1,224)]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 ■■ ■■ ■■■■ ■■■라 ■타■■의 ■■■■. ■■■■ ■■ ■■ ■■■ ■■■ ■■■.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0/304)]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합니다.]

[■■■ (1/0)]

[퀘스트 클리어 보상-■■(0/0)]

 

……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모든 것이 사라졌다.

 김현성은 떨리는 눈으로 다시 한 번 글귀를 읽었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다시 한 번 퀘스트 목록을 열었다.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다. 이기영도, 이기영이 남긴 퀘스트도.

 김현성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가기 시작했다. 말이 되나? 말이 되지 않는다. 이기영, 그가 그린 결말에 그가 없다. 바이러스? 누굴 더러 병균 취급하는 것인지.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인가? 흐르던 눈물마저 멎은 그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려줘.”

 

 그의 공허한 분노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으나 그것을 들어줄 이는 없다. 그러자 둑에 난 작은 구멍으로 그 둑이 터지듯, 한 번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의 분노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를 돌려줘.”

 “돌려줘…. 기영 씨를 살려내.”

 “돌려내, 기영 씨는 병균 따위가 아니야! 그를 돌려줘!”

 “…씨발!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뭘 알아! 내놔. 기영 씨를 살려내라고, 이 개자식아!”

 

 한 구의 시신과 김현성만이 존재하는 방 안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검 하나 손에 쥐지 않은 그의 마력이 요동치고, 그 흉포한 손길에 가구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나이트 테이블, 책상, 의자며 창문까지 죄 박살난 방 안에서 유일하게 평온한 곳은 이기영의 시신이 놓인 침대 뿐이었다.

 

 “부길드마스터, 무슨 일…!”

 “문…! 잠겼…!”

 “……!”

 

 그 소란을 들은 것일까, 그가 잠근 문 밖이 시끄러워졌다.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김현성은 그 문장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때리듯이 떠오른 생각에 난장을 피우던 그의 움직임도 멈췄다. 고장 난 사람처럼 가만히 선 그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그 모습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 같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이기영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눈이 움직이는 뻑뻑거리는 소리가 귀를 쑤셔댄다. 이기영이 삭제되고, 이기영이 남긴 퀘스트가 삭제된다면,

 이기영이 이기영에게 걸어둔 ‘보험’은?

​

 쾅쾅쾅쾅.

 김현성이 멍청하게 고장 나 있는 동안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다급해졌다.

 

 “…형님! 괜찮은 거 맞소? 형님!”

 “…그, 그냥 부, 부숴요!”

 “부길드마스터! 부수겠습니다! 문에서 떨어지세요!”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났다. 바닥을 뒹구는 나무문에 꽂혀 있는 창은 일전에 조혜진이 이기영으로부터 받은 성창이었다. 이윽고 방 안으로 조혜진과 박덕구, 정하얀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혜진은 엉망이 된 방 안을 보고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난장판의 한가운데 선 김현성은 정신을 놓은 듯 가만히 서 있었으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를 보건대 분명 이 소란은 필시 그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가만히 상황을 살피던 그녀의 옆으로 작은 인형 하나와 커다란 인형 하나가 튀어 나갔다.

 

 “오, 오빠…!”

 “형님!”

 

 조혜진은 그들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사치스러운 이기영의 침대였다. 박덕구가 그 앞에 못 박힌 듯 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시선을 조금 내리자 정하얀이 달려가 품에 안은 것이 보였다. 언젠가, 본적이 있는 이기영의 무언가.

 

 “이게, 무슨….”

 “흐엉… 오, 오빠… 오빠… 흐, 흐읍, 누, 눈 떠요…. 자, 장난. 장난치지 마, 말아요. 끅. 끄허으….”

 “…….”

 

 그녀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녀는 멍하니 걸음을 옮겨, 이 상황을 알법한 이에게 다가갔다.

 

 “…길드마스터.”

 “…….”

 “길드마스터.”

 “…….”

 

 그러나 끈 떨어진 인형마냥 고장 난 그로부터는 대답이 없다. 다시 부르는 것을 포기한 조혜진은 현실감 없는 눈으로 정하얀에게 안긴 이기영을 살폈다. 아니, 그것은 이기영이었던 것이다. 감긴 눈과 창백한 안색을 눈에 담던 그녀의 다리에서도 힘이 풀렸다. 조혜진은 여전히 실감할 수 없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락.

 주저앉은 그녀의 아래에서 갑자기 어떤 종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이 어지러운 바닥을 살폈다.

[파란 매뉴얼]

 그리고 그녀의 눈에, 또다시 일전에 보았던 것이 들어왔다. 조혜진의 눈에 돌연 빛이 들었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재빠르게 종이를 모았다. 그리고 모인 종이를 모두 읽어 내린 그녀의 표정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방법이, 방법이 있다. 그녀의 친우 이기영은 역시나, 모든 것을 대비해두었다. 재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밝아진 표정으로 김현성을 불렀다.

 

 “길드마스터!”

 “…….”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제 할 말을 이었다. 이미 김현성이 그것을 전부 읽어본 뒤일 것을 생각해볼 정신이 그녀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방법이, 방법이 있나 봐요. 부길드마스터는 부활할 겁니다. 길드마스터, 정신 차리세요. 다… 그는 다 준비해두고 있었어요. 이걸… 이걸 보세요.”

 “오… 오빠가요?”

 “혀, 형님이 남긴 게 있는 거요?”

 

 그녀의 말에 정하얀과 박덕구가 반응해왔다. 박덕구가 다가와 조혜진의 손에 들린 매뉴얼을 살폈다. 김현성은 모든 대화를 듣고 있기는 했던지, 주위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눈을 감았다. 주먹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핏줄이 불거져 올라왔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두 번. 벌어진 채 가만히 떨리던 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진 씨.”

 “네. 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는….”

 “틀렸습니다.”

 “네?”

 “틀렸다고요. 네. 이런 상황도… 기영 씨의 예비도. 모두 틀렸습니다. 기영 씨는… 기영 씨의 퀘스트도… 전부 사라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윽고 튀어나온 그의 말에. 일말의 희망이 들어찼던 방의 분위기는 산산이 부서졌다. 김현성은 비어버린 눈으로 조혜진을 응시했다.

 

 “기영 씨도, 기영 씨의 퀘스트도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

 “기영 씨가 본인에게 걸어둔 퀘스트도 삭제되었을 겁니다.”

 “아…….”

 “…….”

 

 다시금 방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난장이 된 방과, 고장 나 있었던 김현성을 이해했다. 그 또한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흐윽, 흡. 끄어엉….”

 

 다시금 시작된 정하얀의 울음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설명해요.”

​

 이지혜는 김현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에 그녀를 흘긋 바라보는 김현성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건지 눈 아래는 거뭇했고, 살이 내려 광대 아래가 옴폭 패여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것 같은 눈동자는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누렇게 떠 있었다. 좀비나 다름없는 몰골. 이지혜는 그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찼다.

​

 “쯧.”

 “…….”

​

 그러나 김현성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지혜의 입에 조소가 걸렸다.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짜증은 고스란히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녀의 브레이크 또한 고장 나 있음을 어찌 모르는지.

 

 “이봐요, 김현성 씨.”

 “…….”

 “하. 웃기지도 않아, 정말.”

 “…….”

 “오빠가 왜 당신 같이 한심한 인간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네요. 믿을만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왜 그쪽이랑 이야기하러 왔는지 이해가 안돼요?”

 “…….”

 “무녀가 본 미래에 우리가 함께한다는 말만 아니었으면 당신 따위 그냥 버려두는 건데. 어이가 없어. 이기영은 왜 당신 같은 머저리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걸까? 지금까지 한 선택 중에 제일 멍청했어.”

 “… 기영 씨를, 욕하지 마십시오.”

 

 여태껏 대답이라곤 할 줄 모르는 것 같던 입은 이기영을 욕하는 말에 곧장 열렸다. 이지혜의 눈에 든 짜증은 한층 더 깊어졌다.

 

 “욕하지 말라고요? 어떻게 질책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가 선택한 당신이 이렇게 멍청한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뭘 하지 말아요? 기영 오빠 없는 파란 같은 거, 제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길드마스터가 이렇게 헛짓거리나 하고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지혜는 기어코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영을 제외하고 사람과 말이 통할 리 없는 광증환자에게는 직접적으로 설명해주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지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는 것은 마치 그걸 인정하는 것 같아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이토록 비협조적이어서야 있던 가능성도 사라지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이지혜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아직도 제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하겠어요? 진짜로 한심하네.”

 “…….”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요. 이런 말 하고 있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짜증나니까.”

 “…….”

 “이기영이 왜 자기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시간에 당신과 일정을 잡아두었겠어요?”

 “…….”

 

 그 말에 김현성의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이지혜를 노려보다시피 직시했다. 김현성으로부터 살기에 가까울 정도로 매서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지혜는 전혀 괘념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기영의 마지막 말을 왜 당신에게 남겨두었겠느냐고.”

 “…….”

 

 그녀가 쓰린 패배감을 느끼는 이유.

 

 “이기영이 당신을 선택했으니까.”

 “아….”

 “이기영이, 나를 두고 머저리 같은 김현성을 선택했다고.”

 “아, 아아….”

 

 그리운 이의 말이 김현성의 머리를 스쳤다. 갑작스럽게 머리를 치고 들어오는 깨달음에 언어로 만들지 못한 음절만이 입을 타고 흘러 나왔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수하게 눈을 흐리던 절망을 씻어내기 위함이었으리라. 볼을 타고 미지근한 절망과 날카로운 깨달음이 흐르기 시작하고, 이기영이 선택한 회귀자의 눈과 그 영혼의 단짝의 눈이 마주친다. 이지혜는 그 모습에 이제야 찌푸린 미간에 들어간 힘을 뺄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한다. 이기영은 이지혜가 아닌 김현성을 선택했다. 그녀는 보다 부드럽게 풀린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 사람이 본인의 ‘미래’를 현성 씨에게 맡겼다고요.”

 “…흐으… 흑. 흐윽….”

 “… 진짜, 짜증나.”

 “…….”

 

 김현성은 아주 얼굴을 손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이지혜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그가 울게 두었다. 조금 피폐한 모습이 퇴폐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잘난 외양이라지만, 덩치도 제법 큰 인간이 어깨를 떨면서 우는 모습은 어쩐지 꼴사나웠다. 아니, 그저 이기영의 선택을 받은 김현성이 재수 없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울고 싶었다.

 몇 분이 지나서야 김현성의 떨림이 멎었다. 젖은 손이 김현성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자, 이지혜의 눈에 붉게 충혈 된 눈과 눈물자국이 가득한 모습이 들어왔다.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다정을 가장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조용히 감사인사를 하며 손수건을 받아든 김현성이 어느 정도 수습을 마쳤을 때, 그 공간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왔어요? 늦었네요.”

 

 들어서는 이를 본 이지혜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이곳으로 다가오는 진청은 걸음걸이에서 마저 짜증이 묻어났다. 어느새 이지혜의 앞에 선 그는 그녀에게 여신의 거울을 내밀어 보였다. 화면에는 이지혜가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기영 죽음. 파란 길드하우스로 오세요.]

 “…이게 무슨 소리지?”

 

 그는 신경질적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말 그대로예요.”

 “이기영이, 뭐?”

 

 이지혜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진청은 그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의심이 가득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기영이 죽어? 또 한심한 헛짓거리겠지. 그는 이기영이든 이지혜든 도무지 믿을만한 인간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이지혜가 생각한바 그대로였던 탓에 그녀는 따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죽었어요, 그 사람.”

 “웃기지도 않는군. 또 뻔한 수작질이겠지. 하찮은 블러핑에 넘어갈 정도로 내가….”

 

 그 말에 이지혜는 아직도 눈가가 붉은 김현성을 눈짓했다.

 

 “말조심해요, 군사님. 어디 가서 눈치 없단 소리 많이 듣죠?”

 “…….”

 

 그제야 진청의 눈에 김현성이 들어왔다. 며칠을 굶고 밤을 지새운 듯한 초췌한 행색에 아직까지도 붉은 눈가. 저 인간이 이렇게 망가질 정도라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턱을 매만지며 혼자만의 추리에 빠져들기 전, 이지혜가 확실하게 못 박았다.

 

 “진짜 죽었어요. 이기영.”

 “이기영이?”

 “네.”

 “…….”

 

 의심 많은 진청은 이젠 이지혜를 살폈다. 설핏 보았을 땐 알아채지 못했건만, 이지혜의 눈 또한 붉게 충혈 되어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 얼굴에 약간의 초조함과 불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청의 표정이 점진적으로 어두워졌다. 이기영이 죽었다고? 정말로? 도대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지혜는 그런 진청을 잠시 살펴보다,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주의를 모았다. 그녀에게 시선이 모이자, 그녀는 김현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다 모였으니 시작하죠, 파란 길드마스터.”

 “… 네.”

 

 김현성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지다, 마지막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진청은 이야기의 끝까지 평정과 이성을 유지한 편이었으나, 결국 김현성의 말이 끝날 무렵엔 둘 모두 같은 감상을 내놓았다.

 

 “멍청하군.”

 “멍청했네요.”

 “…….”

 

 이기영답지 않게 생각이 짧았다. 그 말을 들은 김현성의 속은 거북했으나 그들에게 조언을 구해야할 입장이었기에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그저 꾹 쥔 주먹에만 힘이 들어갈 뿐이다. 문득 이지혜가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읊는 것 같은 문장을 내뱉었다.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제 속내가 읽힌 것 같은 기분에 김현성은 슬쩍 이지혜를 보았다. 그러나 이지혜는 딱히 그를 의식하고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진청은 묵묵히 일갈했다.

 

 “헛소리.”

 

 그 말에 이지혜는 피식 하며 김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미소 지어보였다.

 

 “맞아요. 뭐, 들어보니 방법이 보이네요. 왜 무녀가 우리를 모아뒀는지 이해했어요.”

 “내가 그 자식을 살려야할 이유가 있나?”

 “그거야 말로 헛소리네요. 이미 머릿속으로 다 계산하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나봐.”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그들의 대화에 김현성의 눈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김현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있다.”

 “있어요. 공교롭게도 다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요.”

 “대체 어떻게…?”

 

 그 말에 진청은 멍청한 김현성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기실 그가 멍청하다기 보다, 이지혜와 진청이 특출나게 명석한 것이었으나 본디 천재의 눈에 범재란 뭇 범인과 다름없어 보이는 법이다.

 

 “간단하다. 이기영이 스스로 건 퀘스트가 삭제되었다면, 다른 쪽에서 부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죠. ‘삭제’ 라고 했는데 아직 시신이 남아있다면 완전히 지우진 못한 걸 거예요.”

 “마침 우리 곁에는 ‘살아있는 신들’이 몇 명 있군.”

 

 그렇게 말한 진청의 눈이 김현성을 향했다. 살아있는 신들, 분명 그와 정하얀, 차희라를 칭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노을빛의 신 김현성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 방법을 그도 떠올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이라면 이미 해봤습니다. 퀘스트 자체가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진청은 그 방법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말을 듣고서도 전혀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테이블 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차 한 잔 내어오지 않은 허접한 접객에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지금이야 시스템이 워낙 튼튼해야지.”

 “맞아요. 약화시킬 방법이 필요하죠.”

 

 그의 말에 이지혜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시스템을… 약화시킨다고요?”

 

 김현성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어봤다. 진청은 대화가 물 흐르듯 통하지 않는 이가 썩 답답했다. 자신과 대화가 제법 통하던 이기영이 도대체 이런 녀석들을 어떻게 참아가며 끌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골치가 아파왔다. 그는 불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쪽도 하나 데리고 있을 텐데?”

 “저도 데리고 있죠.”

 “외신의 잔재.”

 “어떻게든 약화할 수 있을 거예요. 뭐, 따지자면 해킹이겠네요. 대륙에 속하지 않은 외신의 힘을 빌어서 시스템을 약화하고, 당신의 노을로 권한을 취득하는 방식인거죠.”

 “아…….”

 

 이지혜가 그의 불친절한 질문에 답하며 부연설명을 이었다. 이정도로 설명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기영이 선택한 최후의 보루든 뭐든 간에 손절하겠노라고 다짐했건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현성은 이해한 것 같았다. 이지혜는 팔짱을 풀고 턱을 괴며 이야기했다.

 

 “그럼 당연히 ‘틈’이 생기겠죠.”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문 쪽에서 익숙하지 않은 기척이 둘과 익숙한 기척 둘이 느껴졌다. 진청과 이지혜, 김현성의 눈이 모두 그쪽을 향한 것은 당연했다.

 

 “그건 우리도 도울 수 있겠네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김현성에게 제법 익숙한 것이다. 이를 악물고 그 이름을 떠올렸다. 루시퍼. 김현성은 사나운 눈초리로 걸어 들어오는 묘령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저들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루시퍼와 거래한 경험이 있는 김현성은 그들과 다시금 ‘내기’ 따위를 할 생각도,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문득 이지혜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녀에게 미래를 들었다고 했던가. 이게 옳은 길이라는 것일까. 김현성이 복잡하게 어그러진 심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번엔 루시퍼의 뒤에 선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이가 씨익 기분 좋게 웃었다.

 

 “썩 마음에 드는 동업자여서 말이지. 이대로 실직해서야, 실적이 예전 같지 않을 것 아닌가.”

 

 거짓과 선동의 군주 벨리알. 라이오스에서도, 린델에서도 이기영을 괴롭게 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이기영과 동업이라니? 이해하지 못할 말을 들은 김현성이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이번엔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헤헤… 돌려, 돌려받을 거야. 돌려받을 수 있어. 오, 오빠….”

 “…….”

 

 그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고 있는 정하얀과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한소라가 서있었다. 양 쪽 다 하얗게 샌 머리는 전형적인 마력 탈진 증상이었다. 김현성은 그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벨리알과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들이 소환한 것 같았다. 김현성은 다시금 이지혜를 흘겼지만 이지혜는 종종 이기영이 그러했듯, 평온하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그리운 몸짓이 묘하게 이지혜를 믿고 싶게 만들었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김현성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몸부림치며 이기영을 위한 3회차나, 어떻게든 죽어버릴 생각과, 대륙을 희생해 이기영을 구할 몽상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이 이번 회차에서 어떻게든 이기영을 살릴 방법이 있노라고, 그것을 돕겠노라고 말해온다. 그들과 김현성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음에도, 오직 이기영을 위한다는 일념아래 함께하려 한다. 지금 그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먹먹하게 젖었는데, 무엇보다 뜨겁게 타오른다. 김현성은 어쩐지 멎은 눈물이 다시금 맺혀오는 기분이었다.

[기, 김현성 후배! 나도 있어. 신성은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베, 베니고어 잊지 마…! (0/1)]

 그들의 여신이 때늦은 참전을 알려왔다. 그 메시지까지 읽은 김현성은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깨달았다.

 

 “감사… 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그것이 뭇 클리셰 속 영웅이 내뱉을 법한 문장이었음에는 누구도 이견을 갖지 못하리라.

 

 “필요 없다. 감사든, 보상이든 본인에게 받을 테니.”

 

 진청은 이번엔 얼마를 받아내야 수지가 맞을 지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요. 이번엔 세 번은 부려먹어야 속이 풀리겠어.”

 

 그와 함께 몸을 일으킨 이지혜는 이지후와 이기연의 애프터 스토리 구상에 진입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핑계를 대면서도 함께하는 이들의 목적은 이기영의 부활 그 자체였다. 어쩐지 그가 없는 세계라는 것은 저들의 존재를, 대륙에서의 모든 시간을 부정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러하다. 이기영이 없었다면 그들은 대륙에 올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역사는 모두 이기영으로 비롯되었으므로.

 그러니 그가 바이러스라면, 그들은 바이러스 군집이라 칭함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대륙을 관장하는 시스템에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키는 무도한 무리가 될 것이며, 끝내 저 하늘을 붉게 물들여 빼앗긴 이를 되찾아올 것이다. 오로지 이기영을 위해서.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 사이로, 그보다 찬란한 황금빛이 내렸다. 그 배경에 꼭 어울리는 노을빛의 뿔과 노을빛의 날개, 노을빛의 검을 손에 쥔 김현성은 멍하니 내리는 금빛아래 서 있었다. 고개를 위로 올려 눈이 멀 것 같은 빛을 바라보던 그는 근 한 달간의 지난한 여정을 떠올렸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구원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1,224)]

 외신의 잔재, 환생한 천사들의 힘을 빌려 거울호수 아래의 외신과 접선하는 데 성공했다. 이지혜와 진청의 지시 아래 이루어진 교섭은 실상 내기에 가까웠다. 이쪽에서 시스템의 틈을 만들 테니 파고들어 보아라. 만일 당신이 이 대륙을 복속시키는 것에 성공한다면, 대륙의 신성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더는 인간의 신앙을 그리워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것은 어쩐지 배부른 맹수처럼 느른하게 웃으며 내기를 받아들였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구원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2,124)]

 루시퍼와 벨리알과 같은 대악마가 본신의 힘을 쓰며 개입할 때에는 시스템의 틈을 통한다. 이를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시스템의 강제력을 꺾고 그들이 본신의 힘을 끌어내면 필연적으로 시스템에 틈이 생긴다는 말과 같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었다. 그를 위해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루시퍼와 벨리알에게 마력을 제공했다. 명예추기경의 부활을 위해 악마숭배자들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제법 우스운 꼴이었으나, 이들에게는 거짓과 선동의 군주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함께했다. 벨리알은 자신을 배신하고 구원을 탐하는 악마숭배자들을 비난하고 저주했으며, 베니고어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구원받을 것임을 약속했다. 정확히는, 그런 모습을 대륙인에게 보였다. 물론 이 연출의 각본가는 이지혜였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구원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2,170)]

 그렇게 벌린 틈으로 거래를 수락한 외신이 손을 뻗었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뇌리에 깊숙이 새겨진 과거의 참상을 떠올린 사람들은 경악했다. 명예추기경을 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저들은 대륙을 멸망시키려 하는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외신의 세력들을 보는 이들의 얼굴에 절망이 넘실거렸다. 어디로든 도망치려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러나 붉은 용병은 그 전선의 가장 앞을 매웠다. 붉은 전신 차희라의 옷과 몸은 그 머리칼보다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하늘에서 땅을 노리는 이들에게는 마법의 신 정하얀의 원소마법이 휘몰아쳤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이루는 입자들이 터져나가는 공격을 어찌 그들이 감당할 수 있으랴. 파란 길드는 김현성이 가야할 길을 뚫는 것에 주력했다. 그래, 오직 그만이 저 자색 하늘을 지울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그의 검이 시스템마저 베어버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김현성은 다시금 보랏빛 하늘을 베었고, 여전히 남은 틈을 파고들어 차희라와 정하얀, 김현성이 이기영을 향해 퀘스트를 부여했다. 하늘에 난 틈에서는 예전, 이기영의 새하얀 빛과는 달리, 썩 김현성을 닮은 금색의 노을빛이 쏟아졌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구원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3,004)]

 그리고 지금, 김현성은 날개를 펼쳤다. 마치 기둥을 이루듯 쏟아지는 빛이 그의 뇌리 속 남겨진 이기영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그땐 그에게 짐을 넘기는 이들이 원망스럽기만 해 그를 그 빛의 기둥 안에서 빼내려 애썼던가. 그러나 이번에 김현성은 자신이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본능이 아니었다.

 

 [… 현성 씨?]

 

 그의 눈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므로.

 그는 펼친 날개를 움직여 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기영은 새하얀 미로 속에 있었다.

 그 풍경은 그에게는 제법 낯익은 공간이었다. 사라진 김현성을 시스템으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해 비집고 들어왔던 시스템 사이의 틈. 끝없이 이어지는 백색의 벽과 영원이라는 말마저 사라진 것 같은 무상한 공간.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당시에 울고 있던 김현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비해둔 보험이 있지 않던가. 다시 눈을 뜬 그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야, 이거?”

[완료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생각지도 못했다. 스스로에게 걸어둔 퀘스트가 자신이 삭제되어도 왜 유지될 것이라 생각했을까. 이대로 여기에 영원히 처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억만을 곱씹으며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살아있다고 표현해 옳은 것인가? 이기영은 다급하게 제 특성을 떠올렸다. 회귀자 사용설명서. 활성화를 위해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나 불발로 끝났다.

 이기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곱씹는 고독마저 무의미해질 것 같은 허무감이 그를 파고들었다. 김현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이런 공간에 홀로 존재한다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이기영은 그대로 등을 바닥에 대고 드러누워 버렸다. 팔다리를 아무리 쭉 펴도 이 광활하고 공허한 공간에서 그가 차지하는 부피란 0.01%도 늘지 않으리라.

 시간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느끼는 것은 생각의 흐름이었다. 처음엔 분노했다가, 납득하지 못했다가, 정신을 놓았다가, 체념했다가. 이후에는 마치 펼쳐지지 않는 주마등을 억지로 펼치듯 튜토리얼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새겼다. 마지막까지 상기한 그는 어쩐지, 가장 행복한 때에 죽은 것도 호상이라면 호상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돼지 새끼보다 내가 먼저 죽을 줄은 몰랐는데, 하는 미련 또한 백색의 벽에 부딪혀 사라졌다. 사라졌다. 사라졌다. 이기영의 생각도, 이기영을 이기영으로 있게 하는 것들도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의식마저 희미해져 아득한 허무를 부유하고 있을 때에, 그의 정신을 일깨우는 알림이 있었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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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1)]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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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304)]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구원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1,224)]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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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2,124)]

 

……

 계속해서 이어지는 신화 등급 퀘스트가 그의 눈을 메웠다. 이기영은 전율했다.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잘 키운 회귀자 하나 열 시스템 안 부럽다? 이기영은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자 백색의 벽은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씨바…. 믿고 있었다구. 이기영의 주먹 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구원 (1/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3,004)]

 절대 채울 수 없을 것 같던 공허한 공간을 그가 기억하는 노을이 가득 채웠다. 미로를 이루던 벽이 제 이름마냥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기영은 재빠르게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활성화시켰다. 감각이 연결되고, 생각이 연결되고, 영혼이 연결되는 느낌.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눈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현성 씨?]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김현성의 시야가 그대로 그에게 공유되었다. 그 얼굴에 흐르는 눈물의 감촉도, 그 날개의 깃털 하나하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결마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무감하며 모든 것이 무상한 세계에서, 김현성을 통해 이기영은 감각을 되찾았다. 태아의 탄생이 이런 기분이지는 않을까. 희열이 이기영을 감쌌다.

 이내 모든 벽이 부서져 내리고, 이기영의 발아래 대륙이 보이기 시작할 때에 김현성이 그의 앞에 도착했다. 김현성은 한참을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다가 할 말을 고민하더니, 이내 곱게 웃으며 말했다.

 

 “… 어서오세요.”

 

 이기영은 역시나 클리셰로 점철된 대사를 내뱉는 제 영웅을 바라보았다. 고전적인 클리셰를 싫어하진 않지만 정말 틀에 찍어낸 것 같은 말에 그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이 참으로 김현성답다고 해야 하나. 위화감이 없다. 이기영은 그를 한 번, 아래의 난장판을 한 번 보고는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개판이네.”

2. 최종(무한)v2.gif

‘모두를 구하고, 대륙을 구하고, 나를 구할 거야.’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그 귀를 스친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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